녀석의 말대로 며칠간, 며칠이라고 해봤자 고작 이틀이었지마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던 그 쓰레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녀석이 오기 전부터, 아주 가끔 방문하던 손님이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아무렴 찾는 게 있다면 부르겠지 싶어 시선을 돌렸지만 얼마 채 되지 않아 찾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취향이 될 만 한 건 딱히 없을 텐데. 뭣 때문에 날 부르는 건가 싶었지만, 생각 외로 엊그제부터 작업한 내 그림 앞에 자리한 그를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빌어먹을 블론디가 기대하겠다고 했던가. 내 손을 움키며, 세 치 혀를 놀려 지껄였던 녀석의 말을 떠올린다.
"쓰읍. …사겠다고, 그걸?"
아주 새삼스럽게도 반문해본다. 하지만 역시나,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옴에 벽에서 그림을 떼어냈다. 매번 내 그림을 그 모자나 눌러쓰고 다니는 얼빠진 쓰레기가 사가긴 했으나, 녀석에게만 팔 의무는 없었다. 신경 쓸 필욘 없겠지, 아무렴. 하지만 곧바로 나갈 줄 몰랐는데. 그림을 포장하기 위해 책상에 내려놓았다. 문득 벽에 걸어둔 시계를 확인하니, …녀석이 올지도 모르겠다.
***
그를 다시 만나야 하는 날. 단지 그것만으로 아침부터 저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지난 번 일이 여전히 부끄럽기 짝이 없으면서도, 그의 그림을, 그리고 그를 볼 생각에는 기대감이 찾아들었다. 그를 보기가 껄끄러우면서도, 그를 보고 싶었다. 그 이상한 모순은 거래를 위해 화랑을 찾아 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작."
이제는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가볍게 문을 노크한다. 늘 그렇듯 대답은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가 책상 앞에 앉아 저를 향해 불만 어린 시선을 주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헌데 아니었다.
다른 손님이 와 있었다. 그림을 사가는 것인지, 그가, 아이작이 그림을 포장하고 있었다. 막 포장지로 싸이고 있는 그림은 분명, ……그의 그림이었다.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3일 전, 저는 그에게 다음 그림을 기대하겠다, 그리 말했다. 아무도 눈을 주지 않았던 그의 그림. 저만이 시선에 담은 그림. 당연히 이번에도 제가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와 저 사이에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
그가 반드시 그의 그림을 저에게 팔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먼저 값을 지불하는 사람이 사가는 것이 분명 맞는 일이다. 그럼에도, 서운함과 울분이 치솟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곧장 그에게 다가서며 말을 걸 수 없었다. 포장된 그림을 옆구리에 끼우고 가는 손님이 화랑을 나서고, 그와 단 둘이 남았을 때에도 북받친 감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푹 숙여낼 따름이었다.
***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때마침 들어선 녀석은 내 그림이 포장되어 나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꽉 움킨 주먹은 결코 풀리지 않을 것처럼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그래서, …설마 그림 한 점 팔았다는 이유로 주먹질이라도 할 심산인가.
매번 건방진 낯짝을 내게 향하던 녀석이 숙인 고개조차 들지도 못하곤 그저 주먹만 움키고 있다는 사실이 어째서인지 제법 유쾌했다.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오려 것을 삼키곤, 사흘 만에 방문한 녀석에게 거래라는 이유로 전달할 그림을 챙겨왔다.
"뭐 하고 있어. 받아가, 이거."
이것만 건네면 녀석은 돌아갈 테다. 애당초 오늘의 용건은 이것이었으니. 검지 끝으로 툭툭, 두어 번 포장된 그림의 모퉁이를 건드렸다. 언제까지고 거기 우두커니 서 있을 순 없을 테고, 그런다고 해서 팔려나간 그림이 돌아오진 않았다. 두 어깰 으쓱이곤 녀석에게 시선을 둔다.
***
"………, ……."
고의일까? 고의로, 제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주제넘지 마. 그런 의도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침묵 속에서, 제 발 끝에 시선을 둔다.
"…제 말은 조금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셨군요."
기대하겠다,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파는 것은 누구에게 하던 그의 자유였다. 허나 제가 얼마나 그의 그림에 이끌리는지를 알면서, 감상할 기회조차 박탈하고 팔아버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날 가져가라고 할 수도 있는 게 아니던가.
…하긴 그가 저에게 그런 배려를 할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그림을 기대하는 것조차 그에게는 주제넘은 행동이었던 것일까.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욱신인다. 애꿎은 입술을 짓씹어내다 작게 중얼였다.
"너무하시네요."
정말로, 잔인했다. 마냥 서운함이 치민다. 차라리 얻어맞거나 독설을 듣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오도카니 선 채 짧게 원망어린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다시 바닥으로 떨구었다.
***
"……, ………."
원래 저 녀석이 저런 성격이었던가. 물론 파악할 정도로 관심을 둔 적도, 신경 쓴 적도 없긴 했다만, 마치 토라진 어린애마냥 서운한 티를 있는 대로 내며 말을 이어가는 꼴이 제법 우스웠다. 말없이 바라보다 낮게 웃음을 흘렸고, 건네기 위해 올려둔 그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책상 위를 힘주어 두어 번 내려치자 그제야 날 향해 시선이 꽂혔다.
"뭘 기대한 거지? …크흐흐흐흐. 그래, 너무하다고, 내가?"
확실히 그토록 내 그림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거늘, 제대로 볼 기회도 없이 팔려나간 것을 목격한 기분은 억울하겠지. 어쩌면 마치, 가 아니라 정말 토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어깰 으쓱이곤 작업실로 이어지는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캔버스에 한 폭의 그림을 담아내자마자 새로운 것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이전에 녀석이 봤던, 스케치 위에 흰색을 덮은 것밖에 하지 않았으니 처음을 보여주는 거나 다를 것 없었다.
"쓰읍. 들어가. 아니면 돌아가던가. 그리러 갈 거거든, 나는, 그림."
삐뚜름한 입매를 비틀어 뒤틀린 호선을 머금는다.
***
웃는 모양새가 얄밉기 짝이 없다. 입술을 짓씹으며 잔뜩 불만어린 시선을 그에게 주었다.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전부 그의 재량이었고, 손익의 문제가 아닌 감정의 문제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그가 선뜻 타인의 감정을 신경 쓸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
들어오라고? 그림을 그릴 거란 말인가. 영락없이, 토라진 어린애를 사탕 따위로 꾀는 꼴이었다. 확실히 혹하는 데가 있기는 했다. 그가 열중하며, 옷에, 손에 물감이 묻는지도 모르는 채 그림을 그리는 모습.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순순히 꾐에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문 앞에 서선 서운한 심정만 드러내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야 한다. 마지못해 그를 좇아 작업실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말아요, 아이작."
***
서운한 티를 잔뜩 내는가 싶더니 뒤따라 들어서는 녀석에게 힐끔 시선을 두곤 낮게 웃음소릴 흘렸다. 작업실 안, 가운데 자리 잡은 캔버스, 이젤 밑에 깔린 하얀 비닐. 그리고 그 주위에 놓인 도구들. 저 성가신 녀석을 돌려보내는 대로 작업할 생각이었거늘, 녀석을 들여 버리고야 말았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렴 보다가 지겨우면 알아서 나가든 하겠지.
"상관없으니까, 보다가 나가도. 다만-- …시끄럽겐 굴지마. 의자라도 끌고 와서 앉던가."
그림을 그릴 준비로 소매를 걷었고, 구석에 자리한 탁자에서 검은 끈을 꺼내다가 목선을 살짝 덮는 머리칼을 동여맸다. 완전히 묶이진 않았지만, 이거면 됐다. 행여 물감이 튀어선 안 되었으니 검은 앞치마를 걸친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한들 몰입하다 보면 묻기 마련이니.
틀에 고정된 캔버스. 그리고 그 위에 옅게 그어진 스케치와 하얀 밑색. 가장 중요한 것은 흰 밑색을 까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이어질 색감을 덧칠하는 건,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캔버스 안에 담아낼 수 있었으니. 비이클이 뒤섞인 안료에 무색의 화용유를 끼얹고, 조랑말 털로 이루어진 하얀 붓을 손에 들었다.
끝나면 또 기름때와 더불어 물감 투성이가 될 테다.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마는, 나는 캔버스에 무언가 담아내는 동안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끈적하게 뒤집어쓰던 핏덩이가 아닌,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독한 기름이었지만.
옆에 자리한 석유통, 그리고 세척제에 시선을 뒀다가 붓끝에 화용유를 뒤섞은 먹색을 묻혀 과감히 선을 그었다. 점을 찍어가듯 붓끝을 놀려 캔버스 위로, 무엇인지도 모를 선과 점을 그려갔고, 붓을 쥔 손목을 꺾어 하얀 캔버스 위에 그어진 검은 먹선을 번지도록 만들었다.
소매를 걷어두길 잘했지. 붓질을 이어가며 조금씩 캔버스의 존재에 빠져들었다. 옆선을 바라보는, ATTRACTIVE. 녀석의 시선이 이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
"아이작, 제 말 듣고---,"
있어요? 언성을 높여 따지려던 것은 그가 입을 열며 정말로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탓에 목구멍 뒤로 삼켜졌다. 눈을 가볍게 치켜뜨며 그를 바라본다.
머리를 묶은 탓에 드러난 목덜미는 그의 다부진 체격에 맞게 굵직했다. 앞치마를 매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마지못해 의자를 가져다 앉는다. 우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고, 그가 쉴 때 다시 말을 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지금 그는 그저 저를 약 올리려는 생각만으로 가득할 것이 뻔했으므로. 그래, 그가 좀 더 차분해지면.
"………."
분명 그러하리라 생각했으나, 막상 그가 붓을 놀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 계획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다른 것에 생각을 돌릴 틈이 없었다. 그가 손을 움직임에 따라 화폭을 채우는 붓놀림을 숨직인 채 지켜본다.
가볍게 미간을 좁힌 채 그림에 열중하는 그의 눈매는 매번 날카롭게 구는 모습이나, 체격과 어울리지 않게 둥글었다. 완전히 묶기에는 길이가 어중간한 탓에 묶였던 머리칼이 흘러내린다. 그의 옆얼굴을 덮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작업에 방해가 될까, 감히 손을 뻗지 못했다.
재차 그림으로 시선을 둔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착실하게 채워지는 캔버스를 눈에 담으며 그가 그러하듯, 그림에 몰입했다. 제 눈에는 마냥 신기하고, 끌리는 모습이었다.
***
더운 날이 아니었기에 다행이었다. 만약 여름이었다면 실내 가득한 습도, 그리고 맺히는 땀이 신경을 긁었을 터.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림에 몰두한다. 묶은 머리칼이 짧은 탓에 흘러내려 뺨에 닿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아니,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검은색을 캔버스 위로 찍어나갔고, 붓을 세척제에 씻어냈다. 그러고 보니 붓을 바꾼 지 얼마 채 되지 않았는데 붓대가 시원찮다. 말끔하게 붓털을 씻어내고 난 뒤, 붉은 안료를 묻혀 장미 송이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가시넝쿨을 비롯한 잎사귀. 싱긋한 푸르름을 담아내기보다는, 꺾이고 시들어가는 것을.
"……, ………후우…."
아직 멀었다. 원하는 것을 이 자그마한 캔버스에 담아내려면 멀고멀었다. 길게 숨을 뱉으며 세척제에 재차 붓을 씻어냈고, 팔레트를 비롯한 붓을 내려놓는 것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일단 마르고 난 다음에 다시 손대는 게 좋을 테다. 급하게 굴어봤자 좋을 거 없지, 아무렴.
시선을 내려 손을 바라보자, 손을 비롯한 앞치마까지 물감과 기름이 묻어있음을 깨닫곤 미간을 깊게 팼다. 다시 손을 씻고 오는 게, …….
"…있었군, 아직."
아직 있을 줄이야.
***
그의 붓이 화폭 전체를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시선에 담았다.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그림에 시선을 둔 채 숨을 죽였다.
흰 캔버스 위로 검은빛이 덮이고, 빨간 것이 새겨졌다. 시들어가는 꽃잎이 그의 붓 끝자락에서 피어오른다. 죽어가는 것이 그에 인해 태어난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모순이었다.
"아이작."
그의 손이 물감과 기름으로 온통 더러워진 것은 개의치 않았다. 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움킨다. 제 손에 미끌거리는 것이 묻어나는 감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깍지를 끼워 단단히 움키고선 시선을 맞춘다.
"…저번 그림은 어떤 그림이었죠?"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받은 감명만큼, 그의 이전 작품을 보지 못한 것이 사무치게 아쉬웠다. 30분, 아니, 10분만이라도 일찍 왔다면 감상할 수 있었을까. 서운함을, 아쉬움을 도무지 접어둘 수가 없다. 얕게 미간을 패고 맞닿은 시선을 똑바로 유지한다.
***
"……, …아,"
또다시 손이 닿았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말끔한 손이 아닌, 기름과 물감이 한데 뒤섞여 더러워진 손을 깍지 껴서 잡는 녀석의 행동에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당장 씻으려던 참이거늘, 놓아주지 않겠다는 양, 깍지 낀 손엔 힘이 실려 있었다. 물론 이대로 녀석의 손을 꺾어버리곤 밀쳐낼 수 있었지만, 작업실. 내 공간에서 소동을 일으킬 생각일랑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오롯이 나만을 응시하는 블론디의 시선에 눈살을 구겼으나, 짧게 한숨을 뱉는다. 이미 팔려간 그림이건만, 무엇이 저리 궁금하단 말인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노을. 낡은 건물, 그리고 노을. 됐나? 좀 놓지 그래, 씻고 싶거든, 더러우니까."
손가락 사이, 기름과 안료가 한데 뒤섞인 미끌거림이 느껴져 불쾌하다. 몇 시간씩이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몰두한 것이 우스울 만큼, 이 감촉은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입매를 구긴 채 녀석의 손을 떼어내고자 팔을 뒤로 무른다. 코끝이 아릴만큼 기름내가 진동을 하건만, 이 쓰레기는 뭣 때문에 여태껏 이곳을 지키고 있었단 말인가. 얕게나마 이는 두통에 미간을 좁힌다. 냄새가 빠지고 난 뒤, 다시 작업에 임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쯤이면, 칠해둔 색도 말랐을 테니.
***
왜 그의 손을, 그림을 이토록 좋아해서는, 마음고생을 사서 하고 있을까. 마냥 큰 손은 절대 제 손에 오롯이 담기는 법이 없었다.
"………."
노을. 낡은 건물. 그가 담아냈을 그림을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본다. 쉬이 상상이 가지는 않았으나 이제껏 그의 그림을 지켜보아 왔으므로 대략적인 모습은 짐작할 수 있었다.
팔을 무르는 그의 손을 순순히 놓아주곤 그의 뒤를 따라 세면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 역시 그의 손에 묻어 있던 것들이 묻어났으므로 손을 씻어야 했다.
그가 손을 씻는 동안 더러워진 쪽의 손목을 쥔 채 기다린다. 지금에 와서 따져보아야 여운을 털어내는, 좋지 못한 모양새가 될 것이 뻔하다. 길게 나직한 탄식을 뱉곤 거울을 통해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다음부터는 볼 기회 정도는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바람은 이 정도였다. 파는 것도, 전시해놓는 것도 전부 그의 자유이고, 저는 그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 그에게 강요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시선을 내려, 물감이 씻겨 내려가는 그의 손 위로 둔다.
***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몇 번이고 거듭해서 손을 씻었다. 짧디짧은 손톱 아래 파고든 안료를 비롯하여, 손을 흥건하게 적신 기름까지. 아무리 씻어낸다고 한들 기름은 제대로 빠지지 않을 테다. 미간을 얕게 좁히며 손을 씻는 일에 몰두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일만큼 문지른다.
내가 씻고 난 뒤에 저 또한 씻을 생각인지, 녀석이 내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애당초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순서를 기다릴 필요도 없지 않았던가. 못내 불만 섞인 시선을 올려 거울 너머로 녀석을 흘겨보았으나, 마주친 블론디의 두 눈엔 서운함이란 감정이 묻어났다. 서운함? 내게? 그러고 보니 녀석이 들어서기도 전 그림을 팔아넘겼으니 불만을 품긴 했을 테다.
"……성가시게 굴기는."
늘 기분 나쁜 웃음을 머금던 입술이, 그 입매가 아래로 내려가선 평소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내가 왜 저깟 쓰레기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거지. 일순간 불만이 치밀었으나, 그와 별개로 저 성가시고 귀찮은 녀석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매번 입 발린 소리나 지껄이는 줄 알았더니.
물에 흠뻑 젖은 손을 두어 번 털어내곤, 근처에 걸어둔 수건에 물기를 닦아낸다. 볼 기회를 달라. 확실히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구매 문의가 들어온다면 며칠 뒤 따로 보내거나, 혹 다시 찾아와달라고 하면 되는 것이니. 말끔하게 씻은 손을 내려다봤다가, 녀석의 머릴 짓누르듯 헝클이곤 지나쳤다.
"성가시게 안 군다면 생각해보지. 응? 씻기나 해."
***
"윽, …"
머리칼을 헝크는 손길은 예상 외로 부드러웠다. …제 투정에 가까운 요구가 거슬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감이 묻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고선 그가 비운 자리에 섰다. 물을 틀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손을 씻는다.
손에 묻어난 물감을 문질러 닦아내며 든 생각은, 왜 그가 제 요구 자체를 꺼리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매번 제가 칭찬을 할 때마다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했던 데다,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았을 때는 질색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어린애 같은 투정에는 오히려 긍정적인 태도라니.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손을 깨끗이 씻어내고 나왔을 때 그는 그림 앞에 올곧게 서 있었다. 결벽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양 세차게 문질러 닦던 손이 빨갛다. 그의 옆으로 다가서선 유난히 빨간 쪽의 손-그가 그림을 그릴 때 놀리는 쪽의.-에 조심스레 제 손을 겹치고, 감싸 쥔다.
이번에도 쳐낼지는 모르겠으나, 씻어내던 마찰 탓에 열기가 오른 손을 좀 더 잡고 있고 싶었다. 그림에 시선을 둔 채 감싸 쥔 손에 힘을 더한다.
***
캔버스 앞에 자리했다. 아무래도 마르는 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언제까지고 녀석을 앉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불어 그럴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 몇 시간이 더 걸릴지 몰랐다. 손을 씻는 녀석에게 시선을 줬다가, 작업 중인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어딜 더 손보는 게 좋을까. 마무리하기 전, 조금 더 깊이를 넣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시들한 잎사귀에 회색으로 음영을 새겨 넣고, 얼룩덜룩한 벽면을 칠해가면 될 테다.
물소리가 그치는가 싶었더니 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부러 돌아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먼저 말 걸거나 하겠지. 평소 말수가 많은 녀석이었으니 분명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허나 조용히 옆에 자리해선, 손을 감싸며 맞잡는 행동에 무표정하던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잡지마. …뭐하는 거야, 도대체. 잡는 이유라도 있나. 응?"
잡힌 손을 곧바로 빼내며, 거리를 벌린다. 가까이 자리하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모두 다 거북하다. 거부감이 일어 팔뚝 위로 소름이 돋을 만큼.
***
손이 닿자마자 빼내는 모습에 작게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싫을까. 그림에 관한 부탁에는 순응적이면서도 몸이 닿았다 하면 곧장 거부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처음에는 제법 마음이 상했으나, 이제는 제법 우스웠다.
"궁금했으니까요."
.그의 손을 재차 잡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던 제 손을 내려다본다. 전해진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손을 오므려, 주먹을 꾹 쥐었다 풀곤 내리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떤 손을 갖고 있을까. 붓은 어떻게 쥘까, 굳은살이 어디에 박혀 있을까, 손마디는 굵을까? ……그런 것들이요."
동경하는 그림을 피워내는 손이었다.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는 제법 뻔뻔할 법한 생각을 품으며 제 손을 펼쳐 내밀었다. 부드럽게 입매를 휘어 웃는다.
"손, 다시 잡아봐도 될까요?"
***
뻔뻔하다. 저 낯짝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할 정도로 놈은 뻔뻔하고 재수 없다. 내 손이 궁금했단 말인가. 고작해야 붓을 쥐고, 전장에서는 쓰레기들의 숨통을 움키는 손이었거늘. 궁금해 할 이유란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기분 나쁜 블론디를 바라보았다.
"알 것 없잖아. 내 손 어디에 박혀있는지, 굳은살이. 응? 마디도 굵으니까 신경 꺼."
뭣 하러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매번 방문해서 화가의 이름을 묻던 호기심이 죽은 것은 좋았으나, 이따위 관심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사양하지 못한다면 무력을 행사할 정도로. 녀석이 닿았던 손을 강하게 움키자, 손등 위로 뼈마디가 두드러지게 튀어나왔다. 계속해서 내 시간을 앗아간다면 붉은 안료가 아닌, 저 빌어먹을 쓰레기의 피로 캔버스를 칠할 의향까지 있으니.
강하게 움켰던 주먹을 두어 번 쥐락펴락하곤 가슴 앞에 팔짱을 낀다. 한 번 거절당했으니, 저 때와 같이 기죽은 개새끼처럼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 더 바랄 건 없을 테다. 애당초 저깟 놈에게 무언가 바란다는 사실이 제법 우습긴 했지만.
"……………뭐?"
잘못 들은 건가. 헛것을 들은 건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하지만 녀석이 뻗은 손부터 저 뻔뻔한 낯짝까지. …잘못 들은 건 아닐 테데, 분명히. 손을 잡아도 되느냐고? 다시? 잘도 저런 말을 지껄인다. 눈살을 구긴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감히 어느 누가 겁을 상실해선 이 아이작에게 손을 잡아도 되느냔 물음을 건넨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았다, 싶어 기가 찬다. 헛웃음을 짧게 뱉었다.
"싫다고 하면?"
***
"싫다고 하신다면-…,"
움키는 손을 바라다본다. 화풍에 드러나는 붓놀림이 워낙 거칠었으므로 아마도 남성 화가이며, 날카로운 성격 혹은 큼직한 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던 것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짐작한 바가 맞는지만을 확인했을 뿐, 화가가 그임을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더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죠."
싫다고 한다면. …싫다고 한다면 제가 달리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강제로 재차 손을 맞잡아 보아야 제 손이 닿기가 무섭게 뿌리칠 것이다. 머쓱하게 웃음지으며 내밀었던 손을 떨구었다.
"간간히 제 쪽에서 잡는 수밖에요."
요즘 그러했듯, 제가 그의 손을 잡고, 머지않아 간단히 그것이 뿌리쳐지는 것의 반복. 그것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만남을 거듭하고, 그런 식으로나마 접근하다보면 언젠가는 가까워지리라,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뻔뻔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얕게 소리내어 웃는다.
***
어쩔 수 없죠? 그래, 그렇겠지. 제깟 쓰레기가 뭘 어쩌겠는가. 두 어깰 으쓱이곤 녀석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재차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더는 날 귀찮게 굴지 않겠지. 말없이 그림이 채워진 캔버스를 바라보며 건조될 시간을 짐작해본다. 빨라도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저 쓰레기는 돌려보내고,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작업에 임하는 게 좋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갔고, 다시 녀석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슬슬 돌아가, 너도. 그리 말할 생각이었다. 아쉽단 눈빛을 하든 말든, 혹 서운하단 식으로 굴어도 내쫓을 것이었다만, …?
"…뭐? 무슨 소리야."
또 잡겠다고, 손을? 가장 끔찍하고 치가 떨리는 말이었다. 내 손이 궁금했던 건 네놈 사정이었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저 빌어먹을 쓰레기는 방금 말했듯 또다시 손을 잡아올 거고, 난 그 손을 몇 번이고 내칠 것이다. 깊게 생각지 않아도 뻔하다.
깊은 한숨을 보란 듯이 내어 쉬곤 한 손을 들어 내려다보았다. 머리통을 움켜쥘 정도로 큼지막한 손아귀에는 단단한 굳은살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녀석의 말마따나 마디 또한 굵었다. 보고 만져보았으니 충분하지 않나. 미간을 얕게 패며 재차 한숨을 쉬곤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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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스로 들여다보는 손바닥을 저 역시 응시한다. 손가락 사이마다 단단하게 굳은 살이 배겨 있었다. 파레트를 받치고, 붓을 놀리면서 머금은 노련함의 흔적. 얼마나 오래, 자주 작품 활동에 몰두해야 손이 이러한 모습을 띠게되는 것일까. 만약 그가 붓이 아닌 악기를 다루었다면 그의 손은 다른 모습을 했을까. 자잘한 궁금증이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허나 확실한 것은, 그가 다른 방식의 예술에 몸을 담고 있었다 하더라도 저는 그를, 그의 예술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작품, 작품세계 자체가 좋으므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었든,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작."
재차 손을 뻗었으나, 감싸 쥐지는 않았다. 손등이 맞닿도록, 손을 대고선 미동하지 않는다. …그가 조금씩, 제 손에든, 저에게든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조심스레 그의 엄지를 감아 쥐었다.
"다시 물어볼게요. …손, 잡아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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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이 닿았다. 이 지긋지긋한 녀석이 또 성가시게 굴 심산인가, 싶어 가볍게 손을 밀어냈지만, 다시 맞닿는다. 미간을 좁힌 채 뻔뻔한 낯짝을 시선에 담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곧바로 손을 잡아오지 않음에 나름대로 눈치를 살피긴 하는 거 같아 녀석을 쏘아붙이려 열었던 입을 그저 달싹이기만 할 뿐, 부러 군소릴 늘어놓진 않았다.
"…………."
여러 의미로 말문이 막힌다. 숨통이 턱 막히듯, 녀석의 물음에 말문이 틀어막혔다. 학습능력이 부족한 건가? 마치 뒤를 밟던 개를 걷어찼음에도, 계속 뒤따르던 것 같이. 설마하니 이 빌어먹을 쓰레기의 머리는, 모자걸이의 기능밖에 가지지 못한 건가. 사뭇 진지하게 고민에 휩싸였다. 만약 이 순간 저 독심술사 쓰레기가 내 머릿속을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엄지를 감싸 쥔 온기가 꺼림칙하다. 익숙하지 못한 것이 접촉해오는 것은 무척이나 거북한 일이었다. 손잡아도 되느냔 물음을 또 듣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것을 알기에 미간을 깊게 팼고, 긴 한숨을 내어쉬며, 녀석을 외면하듯 시선을 돌렸다. 녀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성가시고, 골치 아픈, 정말이지 목 위에 달린 건 장식이 아닐까 싶은 쓰레기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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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림을 마주한 채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그는 그가 피워내는 그림처럼, 정말로 유화에 가까웠다. 끝없이 그 자신을 덮어 숨기고 있는 느낌이다. 알아도, 알아도 알 수 없는, 숨김으로 가득한 사람. 그것 전부가 그의 모습 자체인 사람. 뚜렷한 빛깔을 가진 사람.
그가 유화 대신 수채화를 다루었다면 천천히 물드는 것에 보다 익숙했을까. …잘 모르겠다.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림을 통해서 그 사람에 대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직 저에게도 제법 어려웠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저는 그의 이러한 화풍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유화를 통해 그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엄지를 감싸쥔 손을 풀어 검지를 더 감싸쥐고, 중지를, 약지를 감싸쥔다.
그리고 마지막 소지까지.
그의 손을 제 손 안에 온전히 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으나 이것으로도 족했다. 최대한 제 손을 벌려 그의 손을 감싸쥔 채, 그림에서 시선을 떼어 그를 바라본다.
"…좋아해요, 아이작. 당신의 손도. 그림도."
***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떤 소리도 존재치 않는 적막. 아무런 대화도 없이 녀석은 완벽하지 못한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얗던 캔버스를 뒤덮은 것은 그림, 이라고 하기엔 그 명칭이 아까울 정도로 부족했다. 쓰읍. 짧게 숨을 들이켜자 끝없이 이어지던 정적이 끊어졌다.
"……………."
손이 다시 맞닿았고, 온전히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이토록 내 손을 잡을 이유는 없을 텐데. 고작해야 그림을 그리는 게 전부였다. 동경? 동경을 이유라고 하였는가. 화가를 동경한단 말인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다. 고작해야 화가이건만. 화방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 내가 있는 이곳만 하더라도 수십 점의 그림을 보관하고 있었으니.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림을 그린 이가 몇 명인지.
좋아해요. 나지막한 한 마디가 녀석의 입에서 나왔다. 계속해서 침묵을 이어간다. 좋아한다, 내 손도, 내 그림도. 확실히 내 앞에서 몇 번이고 극찬을 늘어놓았으니, 어느 정도 호감이 있을 거로 여기긴 했다만.
"난 네가 싫어."
매번 찾아와서 들쑤시는 것도. 그토록 궁금해 하던 화가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줬건만, 그것으로 그치지 못하고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닌가. 정해진 선을 넘어와선 안 된다. 역시 알려주는 게 아니었거늘, 내가 그렸다는 것을.
"………뭘 기대한 거지?"
맞잡았던 손을 빼내며 나가는 입구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슬슬 돌아가. 멀었거든, 완성하려면. 아직 마르지도 않았으니까. 이틀 뒤에 오던지, 알아서 해."
내 말에 기분이 상해, 이대로 돌아가서 다시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
"………."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은 거침없었다. 분명 상처가 될 가시돋힌 말들이다. …욕심. 과한 욕심이었을까. 제가 그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저 또한 그에게 천천히 스며들듯 파고들자했던 것은. 과한 욕심이 아니라면, 다소 성급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아요."
그저 바랄 뿐, 그것에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폐쇄적인 성향을 띠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저에 대한 일말의 호감도 없으리라는 것 또한.
…마냥 저와 거리를 두는 모습이 꼭, 이전에 저를 손가락질하던 학창 시절의 학우들과, 브루스나 티엔을 떠올리게 만들어 결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음에도, 그를 간단히 놓고 싶지는 않았다. 저에게는 소중한 사람인 만큼 올바른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또 다시 나가라는 신호가 떨어진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야 했다. 그리하지 않았다가는 그가 더 날카로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심기를 더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작업실에서 벗어났다.
***
기대하지 않는다? 글쎄. 과연 저 블론디가 제 행동을 돌아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기대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녀석이 벗어난 자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뭘 기대한 거지, 내게. 무엇을 바란다고 한들 그것을 채워줄 생각은 결코 존재치 않았으니. 쓰읍. 짧게 숨을 들이켜곤, 앞치마를 벗어 벽면에 걸어둔다.
한쪽 손아귀에 아직도 온기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불쾌하다. 미간을 좁히며, 몇 번이고 씻었던, 발갛게 달아오른 손을 재차 씻어낸다. 양손을 거듭하여 문지른다.
빌어먹을 쓰레기.
일그러뜨린 입술을 달싹여 욕지기를 읊는다. 내 손을 좋아한다고? 글쎄. 이 손이 너 같은 쓰레기들의 숨통을 끊는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그 낯짝이 어떻게 일그러지고, 그 눈빛이 어떻게 변할까. 웃음을 흘리며 재차 손을 문지르던 도중, 결국 살갗이 벗겨져 상처가 났는지, 붉은 핏물이 세차게 쏟아지던 물줄기에 뒤섞였다. 쯧. 짧게 혀를 차며 손을 뒤로 물렀고, 수건에 물기를 닦아낸다. 붉은 자국이 묻어난다.
한동안 녀석이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군. 이틀 뒤에 오라고 말은 해뒀지만, 정말 녀석이 다시 찾아올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오지 않는 쪽이 녀석에게도, 나에게도 이로울 테다.